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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 시인 노천명(盧天命) 시의 세계와 일대기 by 아름다움


여류시인 노천명(盧天命1912.9.2-1957.12.10)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본명은 노기선(盧基善)이나, 어릴 때 병으로 사경을 넘긴 뒤 개명하게 되었다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화여전을 다닐 때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 졸업 후에는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자를 지냈고,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대동아 전쟁 찬양하는 친일 작품들을 남겼다. 8·15광복 뒤에는 《서울신문》 《부녀신문》에 근무하였다. 6·25전쟁 때는 미처 피난하지 못하여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는 암울하였던 역사 속에서 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정치적인 희생양이 된 적 있는 불우한 작가이다.

태평양 전쟁 중에 쓴 작품 중에는 〈군신송〉등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총 14편의 친일 작품이 밝혀져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다.

1950년북조선 조선인민군 서울을 점령했을 때 피신하지 않고 임화 등 월북한 좌익 작가들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행사에 참가했다가,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조경희와 함께 부역죄로 체포, 투옥되었다. 모윤숙 등 우익 계열 문인들의 위치를 염탐하여 인민군에 알려주고 대중 집회에서 의용군으로 지원할 것을 부추기는 시를 낭송한 혐의로 징역 20년형을 언도 받아 복역했으며, 몇 개월 후에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일제 강점기에 보성전문학교 교수인 경제학자 김광진과 연인 사이였다. 노천명과 절친한 작가 최정희가 시인 김동환과 사귄 것과 함께 문단의 화제 중 하나였고, 두 사람의 사랑을 유진오가 소설화하여 묘사한 바 있다. 김광진은 광복 후 가수 왕수복과 함께 월북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시 〈사슴〉이 유명하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가 부드럽게 표현되고 있으며, 전통 문화와 농촌의 정서가 어우러진 소박한 서정성, 현실에 초연한 비정치성이 특징이다. 그는1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의 천주교 묘지에 언니와 함께 묻혀 있다


푸른 오월

청자(靑磁) 빛 하늘이
육모정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 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正午)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 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 속으로 몰려드는 향수(鄕愁)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
어데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납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노천명은 고독과 향수(鄕愁)의 시인이다. 그러므로 그의 대부분의 시는 흘러가 버린 옛날을 그리워하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젖어 있다.
시 <푸른 오월>도 이와 같은 노천명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시이지만, 감상에 젖어 과거 지향적인 세계에만 빠져 있지 않고 이 시 끝 부분에 과거의 향수를 떨쳐 버리고 미래 지향적인 희망의 세계로 비상(飛翔)하고자 하는 특이성을 보여 주고 있다.
오월에 대한 감각적인 표현과 함께 이 점이 오월에 대한 화려한 느낌을 북돋우고 있다. 특히 청색 이미지를 사용하여 생명으로 충만한 오월의 약동감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시의 제목을 왜 <푸른 오월>로 했는지, 고독과 향수에만 젖어 있기에는 ‘오월’이란 계절이 너무 아름답고 생명이 약동하기 때문이 아닐까? 왜 희망과 기쁨으로 미래 지향적인 결말로 끝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는 향토적인 우리 고유의 정감과 화려하고 화사(華奢)한 서양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오월의 계절적 아름다움을 그리고 있다. 내가 이시를 최초 접한 것은 학창시절이던 국어교과서이다. 당시 나의 가슴은 미래를 향해 얼마나 큰 푸른 꿈을 꾸고 있었던가? 이제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 갈수 없어니 이 시에 대한 애틋한 정이 남다르다고 하고 싶다.
그가 우리 시단에 끼친 공적은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영롱한 서정시로 예리한 감각과 청순한 정서로 애수적인 감정을 잘 조화하고 있다. 여성다운 女性詩, 자학, 고독, 꿈의 절제節制, 옥중獄中의 고뇌苦惱, 인정의 연민 등을 詩에 풀며 여류시인이 빠지기 쉬운 감상을 제어하고, 일종의 극기적인 경지에서 詩作을 했다 평하고 있다. 년 표를 보면서 그의 시를 읽어 보아야 시인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 해 봅니다.


그의 시 세계 와 약력

1. 감정을 절제한 "화려한 전설"의 여류시인
평생을 사슴처럼, 아니 찬이슬 같이 맑은 독신으로 지내며 말을 아끼고 감성과 감정을 절제하는 극기적克己的인 여성으로 한국시단을 빛낸 두 여류시인(노천명과 영운 모윤숙) 중의 한 사람이다. 초기에는 감상적인 서정시와 시편들을 썼으나 카톨릭에 귀의한 후에는 사랑과 종교적인 참회의 詩作으로 전환하였고, 한국여성 최초로 현대시를 구사한 여류 시인이며, 평생을 시작에만 몰두한 모범적 "화려한 전설"의 깔끔한 시인이다.

평評에 따르면, - "그는 여류시인이 빠지기 쉬운 감상을 제어하고, 일종의 극기적인 경지에서 詩作……"을 했다 하였고, - "당시의 범시단지汎詩壇誌 [시원詩苑] 同人으로 데뷔, 영롱한 서정시로 예리한 감각과 청순한 정서로 애수적이면서도 넘치는 감정을 절약하고 있다. 여성다운 女性詩, 자학, 고독, 꿈의 절제節制, 옥중獄中의 고뇌苦惱, 인정의 연민 등을 詩에 풀며……"라고 評하기도 하였다.

<사슴>

모가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鄕愁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珊瑚林](1938년)에서

2. 시인 노천명의 년보(행적)
1912년 9월 2일,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박택면薄澤面 비석리碑石里의 소지주 이며 무역업을 하는 아버지 노계일盧啓一과 어머니 김홍기金鴻基사이에서 차녀로 출생.
1917년, 본명이 노기선盧基善이었으나 6세에 홍역을 앓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나자 하늘이 주신 천명이라 하여 이름을 天命으로 개명함.
1918년, 아버지 노계일 별세.
1919년, 서울 체부동體府洞 이모집에 머물며 진명여자보통학교進明女子普通學校에 입학.
1923년, 진명보통학교 때 언니가 변호사 최두환崔斗煥과 결혼하며 학자금과 생계비를 부담함.
1926년 4월, 진명보통학교 졸업 전 5학년 때 검정시험에 합격,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 우수한 성적으로 "국어사전"이란 별명이 붙었고, 이때에 엘리트의식이 싹튼 것으로 봄.
1927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2년생 신분으로 [동광]誌 입선.
1930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 어머니 김홍기 여사 57세로 별세, 시집 [창변]에 실린 <작별>은 어머니를 추모한 시로 봄.
4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하며 변영로, 김상용, 정지용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음.


<작별>


어머니가 떠나시던 날 눈보라가 날렸다

언니는 흰 족두리를 쓰고
오라버니는 굴관을 차고
나는 흰 댕기 느린 삼 또아리를 쓰고

상여가 동리를 보고 하직하는
마지막 절하는 걸 봐도
나는 도무지 어머니가
아주 가시는 거 같지 않았다

그 자그마한 키를 하고―
산엘 갔다 해가 지기 전
돌아오실 것만 같았다.


다음 날도 다음날도 나는
어머니가 들어오실 것만 같았다
시집<창변> (1945. 2. 25)

1931년, 수필<3·5의 달 아래서>, 시<고성허古城墟에서>, 단편소설<일편단심>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지 [이화(1928년창간)]3호에 발표.
1932년, 이화여전학생으로 교지[이화]와 [신동아]誌에 <밤의찬미(신동아1932.6>>, <단상(신동아1932.7)>, <포구의 밤(신동아1932.10)> 등을 발표. 이화여전시절의 대표작<옥수수>가 있음.

<옥수수>

우물가에서도 그는 말이 적었다
아라사 어디 메로 갔다는 소문을 들은 채
올해도 수수밭 깜부기가 패어버렸다.
샛노란 강냉이를 보고 목이 메일 제
울안의 박꽃도 번잡한 웃음을 삼갔다.
수국 꽃이 향그럽던 저녁―
處女는 별처럼 머언 이야기를 삼켰더란다.


<포구浦口의 밤>

마술사魔術師 같은 어둠이 꿈틀거리며
무거운 걸음새로 기어드니
찌푸린 하늘엔 별조차 안 보이고
바닷가 헤메는 물새의 울음소리
엄마 찾는 듯…… 내 애를 끊네.

한가람 청풍淸風 물위를 스치고 가니
기슭에 나뭇배엔 등燈불만 조을고
사공의 노랫가락 마디마디 구슬퍼
호수湖水같이 고요하든 마음바다에 잔 물살이니

한때의 첫 곡조曲調 다시 떠도네
이 바다 물결에 내 노래 띄워―
그 물결 닿는 곳마다 퍼쳐나 보리
바위에 부딪치는 구원久遠의 물소리
그윽한 느낌에 눈 감고 듣노니
마산포馬山浦의 밤은 말없이 깊어만 가는데……


<사슴의 노래>

하늘에 불이 났다
하늘에 불이 났다


도무지 나는 울 수 없고
사자獅子같이 사나울 수도 없고
고운 생각으로 진여 씨불 것은 더 못되고


희랍적希臘的인 내 별을 거느리고
오직 죽음처럼 처참悽慘하다
가슴에 꽂았던 장미薔薇를 뜯어버리는 슬픔이 커
상장喪章같이 처량凄凉한 나를
차라리 아는 이를 떠나
사슴처럼 뛰어다녀보다


고독孤獨이 성城처럼 나를 두르고
캄캄한 어둠이 어서 밀려오고
달도 없어 주


눈이 내려라 비도 퍼부어라
가슴의 장미薔薇를 뜯어버리는 날은
슬퍼 좋다
하늘에 불이 났다
하늘에 불이 났다


1934년 3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 8회 졸업.
# 졸업즉시 [조선중앙일보]기자로 입사 4년간 근무.
1935년, [詩苑]동인으로 [詩苑]창간호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 기성문단에 진출.
# [詩文學]에도 관여하며 이화여전 동창 박봉자朴鳳子가 살고 있는 오빠 시인 박용철朴龍喆(1904-1938)집에 드나들어 많은 문인들과 교류함.
1937년, [조선중앙일보]를 사직하고 북간도의 용정, 이두구, 연길 등지를 주유周遊함.
# [중외일보]여성지 기자.
1938 [조선일보]출판부 [여성]誌 편집위원.
1938년 1월 1일, 49편을 수록한 첫 시집 [산호림珊瑚林]을 자비로 출판.
#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의 신극운동에 참여 안톤 체홉의 <앵화원櫻花園>연극에서 라네프스카야 부인의 딸 아냐로 분장 열연함.
1941년, [조선일보]출판부 [여성]지 편집위원직을 사직함.
1942년, [조선문인협회]에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간사로 참여.
# [조선문인협회]를 [조선문인보국회]로 강화하는데 적극 나섬으로서 친일행위를 하게되는 오점을 남기게 됨.
1943년, [매일신보]문화부에 입사 조경희와 더불어 "가정란" 담당기자로 2년간 근무.
[서울신문]편집국 문화부 기자.
1945년 2월 25일, 29편을 수록한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을 [매일신보]출판부에서 간행. 초판본인 이 시집에는 친일적인 시 <승전의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흰 비둘기를 날리며> 등이 실려있음.
# 해방 후 [서울신문]편집국 문화부 기자로 근무.
1946년∼1947년, [부녀신문사]편집국 차장.
# [부녀신문]편집국 차장 근무를 마지막으로 기자생활에 종지부를 찍음.
# 일본으로 유학을 목적으로 밀항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1년 후 귀국.
1949년 3월 10일, [동지사]에서 [현대시인전집]을 발행한 가운데 제2권이 [노천명집]으로 간행됨.
# 안국동에서 누하동 225-1호로 이사하고 양녀 인자仁子를 입양함.
1950년, 6.25 전쟁 중 피난을 못한 채 [문학가동맹]에 가담케 되어 9.28 수복 후 부역죄로 20년 실형언도를 받고, 1950년 10월-1951년 4월까지 6개월간의 옥중 생활을 함.
# 노천명은 1.4후퇴 후 대통령 비서실의 김광섭金珖燮에게 삼일절에 출소토록 하여 달라는 편지를 냄. 김광섭은 이건혁李健赫, 이헌구李軒求와 협의한 후 3인 명의의 진정서를 써서 당시 삼군총참모장에게 노천명의 편지와 함께 동봉해 제출함으로 출감케 됨.
1951년 4월 24일, 부산형무소에서 출감.
# 부산 중앙성당에서 "베로니카"(예수가 악당에게 맞아 쓸어져 흘리는 피를 닦아준 성녀의 이름)라는 영세명을 받음.
# 부산의 공보실 중앙방송국 방송국원 촉탁 발령을 받고 합숙소에서 기식.
# 친구의 도움으로 판자집을 짓고 살면서 심한 피해망상증에 걸려 도피적인 생활에 젖음.
1953년 3월 30일, 61편이 수록된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가 희망출판사에서 간행됨.
1954년 7월 7일, 두 번째 수필집 <나의 생활 백서>가 대조사에서 간해됨.
1955년, 서라벌대학 등에 강사로 나가는 한편 이화여대출판부 일도 함.


<어머니>

聖母 마리아를 비롯해서
어머니는 괴로워야 했다

어디서 무슨 일이 났다면
괜히 가슴 철석 내려앉는 것―
두더지는 햇볕이 싫어 땅속으로 든다지만

어느 世上에서나 地下로만 드는 아들이 있어
모진 바람이 눈 위에 소리칠 때마다 더운 房에선 잠을 못자고
어머니는 늙었다

너도 남들처럼 너도 남처럼
넥타이 매고 행길로 뻐젓이 훨훨 다녀보렴
어머니가 죽기 前에
한 번만 이런 모양 보여주렴
<사상계> (1955. 3)

1956년 5월 30일, [이화70년사]를 집필 출간.
# [이화70년사] 집필로 인한 과로에 의해 지병인 재생불능성뇌빈혈증세가 극도로 악화됨.


<아름다운 새벽을>

내 가슴에선 사정事情없이 장미薔薇가 뜯겨지고
멀쩡하니 바보가 되어 서 있습니다

흙바람이 모래를 끼얹고는
껄걸 웃으며 달아납니다
이 시각時刻에 어디메서 누가 우나봅니다

그 새벽을 골짜구니 밑에 묻혀 버렸으며
연인戀人은 이미 배암의 춤울 추는지 오래고
나는 혀끝으로 찌를 것을 단념斷念했습니다

사람들 이젠 종鍾소리에도 깨일 수 없는
악惡의 꽃 속에 묻힌 밤

여기 저도 모르게 저지른 악惡이 있고
남이 나로 인因하여 지은 죄罪가 있을 겁니다

성모聖母 마리아여
임종臨終모양 무거운 이 밤을 물리쳐 주소서
그리고 아름다운 새벽을

저마다 내가 죄인이노라 무릎 꿇을―
저마다 참회懺悔의 눈물 뺨을 적실―
아름다운 새벽을 가져다 주소서
<서울신문>(1956. 12발표), 이 시를 남기고 1957. 6. 16 별세.

* 그녀는 어쩌면 운명의 날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불운하게도 어쩔 수 없이 일제치하와 6·25전쟁 공산치하에서 치루어야 했던 친일적親日的, 부역적賦役的 행각에 평생토록 고뇌하고 참회하고 질시와 그리고 그로 인해 고독과 싸워야 했던 일들을 이 詩를 통하여 모두 청산하고 참회, 화해, 용서를 빌며 기도하는 것일 것이다. 저 세상으로 떠나기 전에 남긴 이 한 편의 詩가 가슴을 때린다. 그녀의 기도처럼 참으로 저 세상에서는 눈물이 없는 <아름다운 새벽>에 더는 고독하지 않는 운명의 <사슴>이 되기를 빌 뿐이다.

<장미>

맘속 붉은 장미를 우지직끈 꺾어 보내놓고―
그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

늬 수정 같은 맘에
한 점 틔 되어 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

차라리 얼음같이 얼어버리련다

하늘 보며 나무 모양 우뚝 서버리련다


출처: 문학사랑 *[(시인의 수첩)詩人 盧天命 -자료∼함동진]
위키 백과사전 등 전문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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