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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일의 썸머 by 아름다움

뜨거웠던 여름이 가고나니 가을이 찾아왔다

500일의 썸머
2010년 01월 22일 (금) 이동욱 기자 ldo32@idomin.com

 

영화 <500일의 썸머>는 톰과 썸머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남이 볼 때는 지극히 평범한 얘기죠. 영화가 톰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듯이 썸머를 열렬히 사랑했으나 차여버린 톰의 처지에서 그 시절에 대해 써봅니다.

그이와 500일이라는 시간 동안 만났습니다. 488일째 되는 어느 날, 함께 자주 갔던 작은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오래된 건축물들도 내려다볼 수 있는, 도시 한편에 숨은 쉼터예요. 그이가 내 손 위에 살며시 손을 포갰어요.

시간을 거슬러 가볼게요. 처음 만난 날, 저는 그이한테 완전히 빠져버렸습니다. 건축가를 꿈꿨지만, 당시엔 카드 문구를 정하는 카피라이터로 일했죠. 그이와는 회사 동료였어요. 이후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내가 헤드폰으로 듣던 '스미스(The Smiths, 1982년부터 1987년까지 활동한 영국 록 밴드)' 음악을 그이도 좋아한다고 했죠. 와!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바로 운명이라고 믿었어요.

  
 
 
그이와 손만 스쳐도 설레고, 키스하고 나서는 세상이 아름다웠죠. 길을 걷다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밝아 보이고, 그들과 함께 춤을 추는 듯했죠. 일도 제 뜻대로 술술 잘 풀렸어요.

그런데 290일째 되는 날, 그이는 헤어지자고, 여기서 더는 안 되겠다고, 끝내자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함께 웃던 기쁜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가정용품 매장에서 결혼한 부부처럼 뛰어놀던, 음반 가게에선 서로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던, 극장 객석에 앉아 조용히 수다 떨며 영화를 즐기던 그 순간이요.

절망의 나락에 빠진 듯했습니다. 세상이 날 속이고 버린 듯했죠. 하지만, 그이는 정말 냉담합니다. 저는 일에 의욕도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말이죠. 좋은 친구가 될 준비가 돼 있느냐고 그이가 물어오더군요? 그것도 이메일을 통해서요. 미치겠더군요.

아직 고등교육을 마치지 않은 여자 동생이 이렇게 조언했어요. "오빠는 너무 좋은 기억만 해서 그래. 안 좋았던 기억도 떠올려봐."

생각해보니 영화를 볼 건지 밥을 먹을 건지를 두고 다투던, 제가 손을 잡으려는데 살짝 피하던, 저의 농담에 웃어주지도 않던 찰나들도 불현듯 지나갔습니다. 갑자기 우울해진 모습도, 그러다가 어렵게 화해를 한 장면도 떠올랐습니다. 그이는 쿨(Cool) 했습니다. 미련 같은 건 만들지 않고 떠났으니까요. 제길.

488일째 날, 그이가 손을 포개기 전에 말한 건 누군가와 결혼했다는 사실입니다.

어이가 없었는데, 사연을 들어보니 그럴 수도 있겠더군요. 그이가 식당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결혼하게 된 그 사람이 무슨 책이냐고 말을 먼저 건넸답니다. 그이는 운명이라고 느꼈고요. 내가 운명이라 여긴 그이에게 운명은 따로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떠났답니다.

이렇게 그이와 대화하고 나니 속이 후련합니다. 다시 살아갈 힘이 생깁니다. 카피라이터 일을 그만둔 지 제법 됐는데, 건축가로 제2의 인생을 설계하렵니다.

뜨거웠던 여름(Summer)은 갔지만, 또 다른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법이겠죠? 한 건축회사 면접을 보는데, 괜찮은 사람이 보였어요. 용기를 내 커피 한 잔 마시자고 했죠. 그이의 이름은 가을(Autumn)이랍니다.

◇친절과 불친절의 경계 = <500일의 썸머>는 친절과 불친절의 경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두 사람이 사랑했던 시간을 차례대로 나열하지 않고, 뒤죽박죽 섞어 보여주는 거죠.

영화는 <나비효과>의 일기장이나 <메멘토>의 문신과 같은 어떠한 매개체 없이 시계태엽 감듯이 날을 바꿔놓습니다. 흥미롭지만, 한편으론 정신없는 불친절함이죠. 그럼에도, 로맨틱코미디 작품들의 행복하고도 뻔한 결말로 친절하게 마무리합니다.

둘 이상으로 화면이 나뉘면 시선이 흩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인생극장>을 통해 꽤 익숙한 분할 화면이 '기대(expectations)'와 '현실(reality)'이란 이름을 달고 나타납니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 그이가 나의 맘을 알아주지 않는 비참한 모습이죠. 현실은 이내 기대를 밀어내버립니다.

1966년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페르소나> 등 일부 명작을 흉내 낸 듯한 장면들이 거슬려 보인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소수 영화광이 아닌 다수 관객에게는 음악과 영상이 빚어내는 조화가 이야기와도 어울려 보이겠습니다.

◇사랑에 속고 사랑에 울고 = 남자는 이렇다. 여자는 저렇다. 요즘 인기 좀 끈다는 <남녀탐구생활>에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도 다른 존재로 나옵니다. 남자는 여자를 모르지만, 여자는 남자를 잘 안다고 합니다. <500일의 썸머>도 여자를 모르는 한 남자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로 만들어진 듯합니다.

하지만, 사랑에 속고 사랑에 운 사람이 남자뿐일까요. 영화가 남자 관객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주장에 대해선 반기를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이런 물음만 되뇌게 됩니다. 그때 만났던 당신은 아직도 내 가슴에 뜨겁게 남아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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