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부산 구덕에 얽힌 추억
부산 서구에 사는 사람이면 지금도 구덕산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어린청소년들에게는 구덕산은 꿈과 희망을 심어주던 명산임이 틀림없는 곳이다. 이 산자락을 에워싸고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부산에서 60년대 살았던 사람들은 부산 서대신동 구덕 수원지와 구덕운동장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덕수원지는 당시 부산시 식수원공급을 위한 유일한 저수지로서 아람드리 각종 수목이 우거진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이었습니다. 이 구원수원지를 사이에 두고 바로 곁에 동아대하교 본관 (현 동아대 부속 병원) 경남고등학교. 부산여중고, 대신중학교 조금 옆에는 경남상고 대동중학교 훈성여중 )개성여중 광성공고등 중,고, 대학이 모여 있었다. 지금은 시민공원으로 개방되어 있는데 당시로서는 경비가 참 삼엄했다.
1944년 수원지 일대 228만 3000㎡를 도시자연공원으로 고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1968년 2월 21일 낙동강이 부산광역시의 상수도 수원이 되고 나서야 근린공원으로 바뀌어 개방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생각은 다를 바 없다. 어린 학생들에게는 금지하고 제한하면 더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 것인지 봄이 되면 틈틈이 산림보호자의 눈을 피하여 숲속에 찾아들어 꽃도 감상하고 이름 모를 풀들에 정신을 일었던 날이 있었다.
봄도 짙어가던 날 곁에 있던 학교 누님 되는 여고생이 곁에 닥아 와서 남자 고등학생을 못 보았는지 물어 보면서 어린 우리들에게 나무에 주렁주렁 익어있던 벗지를 따 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무 재주 잘하던 내가 자청하여 올라가서 벗지를 따서 주니 너무도 좋아하던 티 없이 맑은 얼굴의 여고생 누나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구덕수원지 바로 곁에 있던 구덕운동장은 부산에서 거행되는 전국 대항 체육행사는 모두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부산의 도시와 경제규모는 지금에 비하면 참 미약하기도 했다.
구덕운동장에 대하여 설명하면 원래는 서대신동 2가 210의 자리에는 조그마한 동물원이 있었다. 그 동물원의 이웃이 되는 넓은 빈터는 주위 주민들이 많이 모여드는 놀이터였다. 그 놀이터에 1920년 6월 운동장을 개설하였다.
처음에는 ‘부산공설(公設)운동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종합 운동장이었다. 1928년 9월부터 전차가 대청동을 거쳐 오는 선과 남포동을 거쳐 오는 선이 부용동 앞을 지나 운동장 정문 앞까지 운행되면서 운동장 앞이 전차종점 (현재의 대신문화맨션 자리)이 되고는 교통이 편리해졌다.
운동장이 개설되고는 운동행사 뿐만 아니라 경축행사와 궐기대회 같은 것도 많이 열렸다. 일제 때인 1940년 11월 일제가 전력증강이란 이름아래 군사경기가 펼쳐졌는데, 그 때 동래중학(현 동래고등학교)과 부산2상(종전의 부산상고) 학생들이 민족의거인 ‘노다이(乃大)’사건을 이 공설운동장에서 일으켰다.
6. 25전쟁 때는 미군 수송부대가 주둔했었고, 1959년 7월 17일에는 국제신보사(현 국제신문)가 주최한 ‘시민위안의 밤’ 행사 도중 갑작스런 폭우로 장내에 모인 3만여 관중이 일시에 퇴장하는 과정에서 57명이 압사되고 1백여 명이 중경상을 입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1963년 5월에는 육상경기장과 야구장에 스탠드시설이 설치되었고, 1971년 3월에는 구덕실내체육관이 건립되었다.
전국규모의 체육대회로 1973년 10월의 전국체전과 1975년 5월의 제4회 전국청소년체전이 열렸다.‘구덕운동장’이라는 이름은 1982년 1월 사직운동장 개장 때이다. 현대식 시설은 1982년 6월에는 야구장에 조명시설을 하였고, 그 후 1987년 5월에는 제16회 전국소년체전이, 1988년 10월에는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의 축구경기가 이곳에서 열렸다
내가 학창시절이던 당시 공설운동장이란 볼품없는 흙 먼지투성인 마당이었므로 야구 응원하려 운동장에 갔다오면 먼지를 온통 뒤지버 써곤했다. 그런데도 낄길거리며 하루가 즐거웠다.부산의 규모도 구덕수원지에서 시청을 거처 초량까지가 부산의 전체였으며 도심은 지금 서구와 중구가 전부이었다. 그래서 당시 부산에 살던 사람들에게 부산보다 큰 서울은 동경이자 선망의 도시이었다. 이는 아마6.25사변으로 수도가 부산으로 내려 왔다가 수도탈환으로 서울사람들이 서울로 올라가면서 부산의 경기는 매우 침체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 테지만 어른들의 서울에 대한 동경이 자라나는 학생들에게도 그 영향을 미치게 하였을 것이다
정확한 년도 기억은 아니 나지만 서울 창덕여고와 부산에 있는 여고와 배구시합에서 어린 학생들은 훤칠하게 잘생기고 몸매 좋은 서울 창덕여고 에 부산 남학생들이 응원하자 약이 올라서 항의하던 이웃사촌 누나 격인 여고학생들의 화가 난 얼굴들이 생각난다. 요사이는 자기가 선호하는 팀에 응원하고 선수와 더불어 즐기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지만 당시로서는 심각하게 받아드려지던 일이었으며 그 후에도 그 일을 두고 평이 오래토록 갔던 일이 있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모두가 자기본위로 생각하고 자기 나름 데로 행동하기 마련인데 해답은 세월이 답인것 같다.
그 청순한 여고생들이나 다람쥐처럼 뛰어 단니며 철없이 마냥 웃음을 달고 살던 내 자신이나 이제 그 시절을 회상해 본다면 너무나도 변하여그 흔적마저 찾아볼수 없을 것 같고 그때가 한 토막 추억에 불과하며, 인생의 삶은 이런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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